디센트 해부

영화 2007. 9. 18. 23:01

 

디센트를 드디어 보았습니다.

별다른 정보 없이 영화를 보았고, 나름 몰입하여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영화 결말부에 감독이 관객에게 말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결말은 누구나 보셨듯이 동굴탐험 친구들 중 마지막으로 살아남아 탈출한 줄로만 알았던 사라는 탈출한 것이 아니라 동굴에 고립된 채 영화는 종료하게 되죠.

 

그럼 과연 이게 다일까요??

 

감독은 2중 복합 결말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즉 간단히 킬링타임용으로 보신 분들은 대부분 위와 같은 결말로 알고 극장을 나서겠죠.

 

그러나 이 결말이 다가 아니라는 것의 증거가 영화 곳곳에 장치되어있습니다.

 

1. 영화 엔딩크레딧에 나오는 탐험 전 단체사진은 이 탐험 자체가 현실임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즉 이 영화 어딘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죠.

 

2. 또 영화 초반부 18분30초경, 산을 걸어서 오르기 시작하면서 "주노"가 탐험 규칙을 설명합니다. 그 규칙들에 보면 어둠속에서 탈수증세와 방향감각 상실, 폐쇄공포증 그리고 공황상태, 망상증, 환각, 시각과 청각장애가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즉 영화 초반부에 이미 이 영화 내용중에 누군가의 "환상"이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3. 그럼 그 "누군가"가 누구일까? 물론 이 영화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사라"가 그 주인공입니다. 일단 사라는 병원에서도 환각상태를 보이는 증세가 있었습니다. 또한 탐험 전날 친구들끼리의 대화중에서 보면 "난 결혼하면 애를 많이 나을꺼야"라고 친구의 말을 듣는 대목에서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사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12분14초경) 이는 친구들에 대한 묘한 질투심이나 다른 복합적인 감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예측됩니다. 그 밤엔 또 창문으로 파이프가 자신을 향해 날라오는 환상? 악몽을 꾸기도 합니다. 어쨌든 사라의 정신상태가 전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하지요.

 

4.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사라"는 약을 먹습니다. 즉 사라의 환각증상이 아직은 완치가 안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소화제라고 우기는 분은 없겠죠?)

 

5. 그리고 여행을 떠나서도 앞 차를 운전하는 사라는 약의 여파인지 흥분되서 그런지 위험한 속도로 차를 운행합니다. (마치 음주운전자가 과속을 하거나 마약에 취한 환각상태에서 운전하듯이 위태위태한 드라이빙 모습을 길게 보여주죠.)

 

위와같이 영화는 초반부에 "사라"에 대한 친절하지 않은 친절한 암시를 여러가지 제공합니다. 이는 사라가 우연히 마지막에 살아남게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 치고는 너무 거창한 듯 합니다.

 

그럼 어디서부터가 환상일까요??

 

정확히 말하면 25분04초, 동굴 내에 진입해 첫통로를 지나 두번째 광장에 다다랐을 때입니다. 여기서부터 다른 누구도 아닌 "사라"만이 정체모를 괴물의 "소리"를 듣기 시작합니다. (왜 하필 사라일까요?)

 

그 후 두번째의 좁은 통로를 지나면서 몸이 끼인 사라는 "폐쇄공포증"을 겪습니다. 진정한 환상은 여기서부터란 이야기죠. 통로가 무너지면서 (긴 암전 후) 가까스로 살아난 "사라"의 시선은 딸의 케잌과 함께 시작됩니다. 즉 고질적인 환각증세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후 홀리의 실수로 다리가 부러진 후 사라는 동굴 내에서 최초로 정체 모를 괴물을 목격합니다. (역시나 왜 하필 "사라"일까요? - 덧붙여 사라는 첫 목격이지만 "처음이 아니야, 전에도 본것 같아"라고 말하죠. 주노는 그런 사라를 환각이라고 하며 탈출할 수 있다고 달래며 안정시킵니다. 과연 누구 말이 맞는걸까요?)

 

사라의 캠코더 시선 (적외선) - 괴물의 첫 출현

 

이후부터 영화가 끝나기까지 나오는 괴물의 습격들..

그러나 첫 괴물의 습격때도 그냥 넘기기 힘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첫 습격시의 시선은 부상당한 홀리의 캠코더를 적외선 모드로 하여 보고 있는 "사라"의 시선이었다는 거죠. 여기서 모두 놓치는 것이 습격 바로 직전에 모두들 플래쉬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친구들도 플래쉬로 주위를 살피는데 "사라"만이 유독 캠코더의 적외선 촬영 모드로 주변을 살핀다는거죠.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죠. 즉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가시광선)이 아니라 이미 사라는 캠코더(적외선)를 통해 새로운 환각을 만들고 있었던겁니다.

 

이후 계속 도망치는 것은 바로 다른 네 친구들이며 첫 습격 이후 "사라"는 줄곧 혼자입니다.(주노와 만나기 전까지)

 

딸의 뒷모습 환상이 이내 괴물 모습으로 바뀝니다.

 

또한 괴물의 첫 습격 후 기절중이던 "사라"는 다시 딸의 환상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돌린 딸의 얼굴은 "괴물"의 모습이죠. 이 또한 결정적 증거입니다. "딸"도 환각속에서 존재하지만 마찬가지로 "괴물"도 환각의 산물이란 것을 암시하는 감독의 힌트인 것입니다..

 

 

여기서 헷갈리지 말아야 하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영화 초반부 동굴밖의 동물 시체는 실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괴물들과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영화 후반부에도 나오지만 괴물들은 동굴 깊은 곳에 살기에 두 눈이 퇴화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즉 괴물은 동굴 밖에서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죠. 따라서 괴물이 실재하다는 증거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럼 왜 이런 장치를 극 초반에 해놓았을까요.

 

이 영화는 호러영화입니다. 그리고 호러로써의 긴장감을 이끄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괴물이죠. 그런데 괴물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주었다면 관객의 몰입도와 재미는 반감되었을 것입니다. 즉 괴물의 존재 자체를 전혀 반감없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초반에 동물시체 등으로 보험을 들어둔 것일테죠. 다만 단순한 보험이 아니라 극 전체를 모두 이해한 다음에 보면 그것은 보험이 아니라 또 다른 스토리의 단서가 되도록 치밀하게 구성했을 뿐입니다.(정말 이 감독 쵝오입니다!!)

 

동굴 가이드북을 가져오지 않은 것. 이것 또한 실제입니다. "사라"가 극심한 폐쇄공포증으로 인한 환각, 환청의 행동을 하게된 계기가 바로 함몰된 동굴 내에서 가이드북도 없이 탈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두려움과 혼란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이와는 반대로 첫습격 이후 묘사되는 "사라"는 정신분열 환자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침착하고 용감합니다. 또한 후반부 주노와 둘만 남게 된 후 괴물 세마리와 싸울 땐 용감을 넘어 매우 잔인하게 괴물을 죽이죠.(괴물을 물어뜯고 두눈을 엄지로 깊숙히 찌르는 등)

 

그리고 모두들 괴물들과의 사투속에 나홀로 탈출에 성공했다고 믿는 순간, 다시 돌아온 동굴속에서의 딸의 환각, 그러나 환각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환각을 바라보는 "사라"의 모습을 주의깊게 보십시오.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으며, 케익이라고 여기는 것은 횃불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표졍... 괴기스럽죠;; 전혀 괴물로 인한 "공포"나 "좌절"은 읽혀지지 않습니다. 즉 여전히 환각속에 빠져있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게다가 바닥에 떨어져 기절하는 순간에 있던 주변의 뼈다귀들이 "탈출의 꿈"과 "딸의 환상"이 지나 다시 동굴씬으로 돌아온 후 사라 주변을 보면 그 많던 뼈다귀들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있습니다. 한마디로 깨끗하죠. 괴물의 첫습격부터 보였던 그 많던 뼈다귀들도 원래부터 없던 것이라는, 아니 괴물 조차도 없었던 것이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또한 감독은 영화가 끝나면서 사라를 보다 멀리서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보다 객관적으로 말이죠. 그녀의 표정, 동굴, 그리고 괴물의 울음소리(괴물이 없는), 그리고 그녀의 비명소리(절규) 등등

 

바닥에 떨어진 사라의 주변에 뼈다귀들이 보인다.

 

탈출의 꿈에서 깨어난 사라의 주변엔 뼈다귀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영화 전체적으로 "사라"의 딸과 케익이 나오는 환상은 이 영화의 중요한 암시와 전환 기점을 표시해 주었던 겁니다. 통로 함몰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난 직후 사라의 케익 환상때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엔딩씬의 케익 환상까지 "사라"는 여전히 환각(괴물,딸,케익)과 환청(괴물의 울음소리)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단순히 그녀가 탈출한 줄 알았지만 잠시의 꿈(탈출한 줄 알았던)에서 깨어나 홀로 괴물들과의 사투를 벌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그저 영화 막바지에 "사라가 살아남아서 다행이네. 이제 사라는 어떻게 되지?" 라고 유도하는 감독의 의도 속에서 왜 "사라"가 살아남았는지, 왜 "그녀"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유추하는 것이 이 영화를 높이 평가 하게 만드는 최고의 포인트이자 핵심입니다.

 

결론은 전적으로 여러분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괴물이 실재한다고 믿고 재수없는 여섯명의 아줌마전사들은 골룸집단과 피터지게 싸우다 죽었다라든가.. 한 명의 정신분열 친구(사라)로 인해 그녀의 남편을 좋아했던 주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레베카를 비롯한 친구들이 퇴로 없는 동굴속에서 학살을 당했다고 해석해도 좋습니다. 이도 저도 아니면 모두가 갇힌 동굴 속에서 극도의 공포와 좌절, 물고 물리는 죄의식으로 인해 각자의 환각속에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쇼를 했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죠.

 

덧붙여>>

영화 마지막, 사라가 혼자 남겨진 동굴에서의 환상신을 자세히 살펴보면 흐려진 시선에 보이기 시작하는 케익의 촛불은 5개입니다.(초반부터 줄곧 5개입니다.) 그러나 딸과 함께 보여지는 케익의 촛불이 순식간에 6개로 바뀝니다. 이건 제작진의 실수였을까요? 아니면 다른 네티즌의 추측대로 5명 친구들의 죽음(5개)에 사라의 죽음(6개)을 암시하는 것일까요?

 

동굴탐험은 남편과 사라의 죽음이 있은 후 1년이 지난 시점이므로 사라의 케익엔 촛불이 6개여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사건시점인 병원씬에서의 환각에서는 촛불이 5개였던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런데 동굴 탐험 내 보았던 환상에선 줄곧 5개였다가 왜 친구들이 모두 죽고 혼자 남겨진 상태에서 케익의 촛불이 6개로 늘어났을까요.

 

이는 1년전의 사고가 남편과 주노의 불륜, 그리고 그 사실을 침묵했던 레베카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원한 해소, 복수가 완결되었기에 사건시점으로 멈춰졌던 환상속의 시간이 다시 흐른 것으로 봐야할까요? 알면 알수록 미로속으로 빠져들 뿐입니다.

 

* 최종평 : 호러는 호러대로 살리고, 반전은 큰 흐름 속에 깊숙히 숨겨놓은 정말 비범한 영화!!

[출처 : 네이버 지식in]

Posted by 블루아레나

욕망의 모호한 대상

영화 2007. 9. 13. 23:50
욕망의 모호한 대상.

루이 브뤼넬의 이 영화에서 말해지는 건 제목 그대로이다. 마띠유는 돈으로 사랑하는 젊은 여인을 사려고 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그런데 그 실패는 계속되는 성공의 끝자락에서의 실패다. 젊은 여인 콘치타는 그의 돈을 처음엔 거절하지만 현실의 법칙대로 결국엔 돈을 수락한다. 마띠유가 번번히 대상 콘치타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콘치타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는 새로움 없이 통속적인 방식으로 콘치타의 타락 혹은 추락으로 보상받는 듯이 보인다. 콘치타는 다시 금전적 어려움으로 몸을 팔며 생활하고 있다. 마티유는 이러한 콘치타와의 재회에서 그러한 상황을 연민의 감정으로 본다. 그리고 다시 콘치타를 금전적으로 도와주지만 콘치타는 그러한 마티유를 배반하며 비웃는다. 이는 콘치타가 "당신은 너무 순진하군요"라는 말로 어떤 진실을 보여준다. 그건 콘치타 자신과 마티유에 대한 조언과 같다. 마티유가 원한건 콘치타와의 성관계였지만 그것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영화는 끝맺는다. 하지만 그에 앞서 마티유는 그러한 성관계를, 즉 대상을 가지는 것을 암시하는 풍경을 보여주는데, 그의 지배인이 말하는 한 철학자의 말로 상징된다. "여자와 오래동안 지내려면 몽둥이를 옆에 두고 있어야 한다"

[아하! 맞다]
 굵게 표시된 부분에서 나오는 하인의 말. 그런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 말대로 하니 콘치타가 마티유 옆에 서게 되는 상황들.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영화의 최고조에서 보여주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철학자가 말하고자한 폭력이었다. 마티유는 결국 자신을 실망시킨 콘치타에게 분노하고 폭력을 가한다. 그러나 그러한 댓가로 마티유가 그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 오히려 그녀를 갖게 된다. 그녀는 그러한 마티유에게 오히려 매달린다. 이는 콘치타가 그동안 자신에게 베풀어온 마티유의 은혜, 선행에 갚을 수 없는 부채를 덜어내는 방법이었다. 이는 다른 많은 영화들에서도 주제화 되어 왔다. 약간 변조된 형식으로 일방적인 사랑과 계속 되는 도피...포레스트 검프의 내용도 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포레스트 검프에서 제니는 포레스트의 사랑을 받아 들이는 순간 죽는다. 아니 그녀는 병에 걸려 포레스트를 만났고, 이는 그녀의 죽음이 포레스트를 받아 들인 것이다. 이는 브뤼넬의 영화가 폭력으로 해소한 부채의 해소방법을 택하는 대신 낭만적 결말을 택한 것이다.

[글쎄~ 이건..좀..]
 굵게 표시되는 내용은 맞다고 생각 되는데, 감독이 폭력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는 것은 겉만 본게 아닐까. 감독은 중간중간 테러와 살인등의 슛을 넣어서 모호한 욕망에 대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낭만적 결말이라니?
 덧붙여 얘기하면 엔딩은 그리 낭만적 결말이 아닌데! 콘치타가 결국 마티유의 마음을 알고 화를 내고 마티유는 거기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제스쳐를 취하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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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블루아레나
브뉘엘Bunuel의 영화 요소
- 기생성 : 콘치타, 콘치타의 어머니
- 노예근성은 하인뿐 아니라 주인의 특징이다 : 콘치타는 하녀이고, 마티유는 주인이다. 콘치타 1은 돈의 노예인 듯 행동하고 콘치타 2는 돈의 노예근성으로부터 해방되려고 노력하는 듯이 보인다. 여기에 마티유의 성적 노예근성이 대립한다
- 영화에 나타난 충동-이미지=자연주의적인 충동의 이미지=자연주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폭음, 총소리 등은 갑작스런 충동의 솟구침, 즉 죽음의 충동이 솟구치는 것을 나타낸다. 영화에서 자연주의는 죽음, 죽음의 충동으로 흠뻑 적셔져 있다. 당신은 십자수하는 여인의 장면에서, 천을 찔러 나오는 바늘의 미세한 움직임에서 충동, 즉 마티유의 내면의 충동을 느꼈는가, 콘치타는 그것을 눈치채고 또 다시 마티유를 뿌리치며 돌아선다
- 들뢰즈는 자기 저서 <영화1>에서 이렇게 말한다. "브뉘엘은 영화적 이미지 속에 반복의 권력을 주입한다." = 영화에서 반복되는 소리들에 주목해 보라.
- 자연주의 영화의 특징=타락, 쇠락. 영화에서 부자(주인)이 가난한 자(하인)으로 한 단계 떨어지고 퇴락하는 과정을 보라. 마티유는 결국 자기가 사 준 콘치타 집 앞에서 황당한 일을 보았다. 하인의 위치로 전락하는 마티유의 여러 모습들을 상기하라(상자 갖다달라는 콘치타의 말에 따라 그렇게 하는 장면 등). 인물의 퇴락
- 충동impulse란 무엇인가? = 충동이란 아무리 저급하고 불쾌하고 혐오스러울지라도 그 가장 심오한 수준에 있어서는, 환경을 변화시키려는 욕망이며, 새로운 환경을 찾고 이 환경이 제공하는 것을 더욱 향유하면서 그것을 탐험하고 탈구시키려는 욕망이다
- 이 욕망이 지연된다, 콘치타2는 콘치타1의 반복이자, 바로 그 반복 때문에 그 욕망은 더욱 더 지연된다, 폭음, 콘치타와 자려던 순간에 창문 바깥에서 일어난 테러사건, 욕망이 지연된다는 것이 곧 '모호한'obscure의 뜻이다. 욕망의 대상이 모호하다는 것의 의미다. 영화에서 욕망은, 콘치타와 자고 싶어하는 마티유의 욕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충동의 욕망이 한없이 지연된다는 것=모호성
Posted by 블루아레나
감 독 : 스페인의 아라공에서 태어난 루이스 브뉘엘은 부유했던 부모의 강요로 카톨릭 학교를 다녀야했다. 18세기 이래 하나도 변한 게 없는 엄격한 교육을 받은 브뉘엘은 이때부터 평생을 종교에 맞서 싸울 것을 다짐했다. 마드리드 대학 재학 중 당시 싹트기 시작했던 유럽영화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브뉘엘은 파리에서 프리츠 랑 감독의 <운명>이란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파리 영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프랑스의 유명한 영화감독 장 엡스탱을 찾아가 조감독을 자청해 영화제작 기법을 익힌다.
그리고 1928년, 초현실주의 화가였던 친구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어머니가 부쳐준 돈으로 단편영화를 만들게 되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안달루시아의 개>이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귀가 맞지 않는 영화였다. '옛날 옛적에', '8년 후', '새벽 3시', '16년 전' 등의 자막이 깔리면서 시제를 왔다갔다하는 것은 물론이고 줄거리도 연결되지 않는다. 브뉘엘이 인간의 모든 경험을 영화에 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으니 줄거리가 잡히지 않는 게 당연했다. 인간의 무의식, 꿈, 광기를 비합리적인 연상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만들어낸 이 영화는 영화인들의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엄청난 화제를 불러모았다.
이어 브뉘엘 감독은 성욕과 교회 때문에 고통을 겪는 한쌍의 남녀에 관한 이야기인 <황금시대>(1932)를 통해 자신이 청소년기에 다짐했던 종교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이 작품은 두 남녀의 꿈속에 들어가 기록영화를 찍듯이 시작하는 영화로 예수의 등장장면이 문제가 되어 카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각국에서 상영금지조치를 당한다. 이에 반발한 브뉘엘은 스페인 서부지방의 끔찍한 빈곤의 실상을 냉정하게 담으면서 이 모든 것이 교회와 정부 때문이라는 걸 조목조목 따진 전투적인 기록영화 <빵없는 대지>를 만들어낸다.
이로 인해 브뉘엘 감독은 15년간이나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된다. 1946년, 멕시코로 이주한 브뉘엘 감독은 그의 세 번째 영화 <버려진 아이들>(1950)로 잃었던 세계적 관심을 되찾는다. 멕시코 아이들의 빈한한 삶과 꿈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군데군데 그의 초현실주의적인 취향을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은 평론가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를 계기로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온 브뉘엘 감독은 <비리디니아>를 내놓는다. 갓 수녀가 된 비르디니아가 모욕받고 상처받고 타락해가는 과정을 담은 이 작품은 교회가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망치는가를 브뉘엘식으로 공격한 작품으로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장면 - 예수의 제자들 대신 거지들, 도둑들, 저능아들이 등장한다 - 으로 스페인 정부는 상영금지 조치를 내렸지만 칸느에서는 황금종려상을 받아냈다.
그리고 브뉘엘의 후기 전성기가 시작된다. <추방당한 천사>(1962), <시골하녀의 일기> (1964), <세브린>(1967), <트리스타나>(1970),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 <자유의 환영>(1974),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기존 사회와 문화가 정한 어떤 범주에도 안주하지 않고 자기식의 영화를 만들어내며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사회와 인간의 우스꽝스런 단면을 그려냈다.


Posted by 블루아레나
Q.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란 영화를 보면 여주인공 역할을 두 명의 여배우가 하잖아요.

A. 부뉴엘이 밝히기론
Posted by 블루아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