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1928년, 초현실주의 화가였던 친구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어머니가 부쳐준 돈으로 단편영화를 만들게 되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안달루시아의 개>이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귀가 맞지 않는 영화였다. '옛날 옛적에', '8년 후', '새벽 3시', '16년 전' 등의 자막이 깔리면서 시제를 왔다갔다하는 것은 물론이고 줄거리도 연결되지 않는다. 브뉘엘이 인간의 모든 경험을 영화에 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으니 줄거리가 잡히지 않는 게 당연했다. 인간의 무의식, 꿈, 광기를 비합리적인 연상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만들어낸 이 영화는 영화인들의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엄청난 화제를 불러모았다.
이어 브뉘엘 감독은 성욕과 교회 때문에 고통을 겪는 한쌍의 남녀에 관한 이야기인 <황금시대>(1932)를 통해 자신이 청소년기에 다짐했던 종교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이 작품은 두 남녀의 꿈속에 들어가 기록영화를 찍듯이 시작하는 영화로 예수의 등장장면이 문제가 되어 카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각국에서 상영금지조치를 당한다. 이에 반발한 브뉘엘은 스페인 서부지방의 끔찍한 빈곤의 실상을 냉정하게 담으면서 이 모든 것이 교회와 정부 때문이라는 걸 조목조목 따진 전투적인 기록영화 <빵없는 대지>를 만들어낸다.
이로 인해 브뉘엘 감독은 15년간이나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된다. 1946년, 멕시코로 이주한 브뉘엘 감독은 그의 세 번째 영화 <버려진 아이들>(1950)로 잃었던 세계적 관심을 되찾는다. 멕시코 아이들의 빈한한 삶과 꿈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군데군데 그의 초현실주의적인 취향을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은 평론가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를 계기로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온 브뉘엘 감독은 <비리디니아>를 내놓는다. 갓 수녀가 된 비르디니아가 모욕받고 상처받고 타락해가는 과정을 담은 이 작품은 교회가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망치는가를 브뉘엘식으로 공격한 작품으로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장면 - 예수의 제자들 대신 거지들, 도둑들, 저능아들이 등장한다 - 으로 스페인 정부는 상영금지 조치를 내렸지만 칸느에서는 황금종려상을 받아냈다.
그리고 브뉘엘의 후기 전성기가 시작된다. <추방당한 천사>(1962), <시골하녀의 일기> (1964), <세브린>(1967), <트리스타나>(1970),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 <자유의 환영>(1974),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기존 사회와 문화가 정한 어떤 범주에도 안주하지 않고 자기식의 영화를 만들어내며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사회와 인간의 우스꽝스런 단면을 그려냈다.
스캔들로 혁명을 일으키다
브뉘엘은 1900년 2월 22일 스페인 아라공 남쪽지방의 조그만 마을 칼란다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칼란다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도 계속 중세시대라고 불릴 만큼 옛 전통을 고수하던 마을이었다. 브뉘엘은 당시 어김없이 울리던 성당의 종소리와 들판에서 까마귀들이 죽은 당나귀를 파먹는 장면을 인상 깊게 기억한다. 어린 브뉘엘의 눈에 까마귀들의 모습은 검은 법의를 걸친 굽은 등의 사제들처럼 보였다. 사춘기 때 브뉘엘을 자극한 가장 강렬한 경험은 이런 죽음과의 대면이었고 종교적인 분위기였다. 어린 시절 그의 삶에 가장 영향을 미친 책은 다윈의 '종의 기원'과 파브르의 '곤충기'였다. 그는 모든 생물체에 호기심을 지녔다. 그는 나중에 "곤충의 삶에서 셰익스피어와 사드의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브뉘엘의 이런 독특한 취향이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브뉘엘은 마드리드 대학시절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와 만나 초현실주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그와 함께 <안달루시아의 개>와 <황금시대>를 만들었다. 브뉘엘은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 함께 일종의 혁명을 꿈꾸었다. 그들 모두 자신들이 혐오하던 사회와 투쟁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총 대신 '스캔들'이라는 무기를 사용했다. 그들은 착취, 식민지적 제국주의, 종교적 폭정과 같은 사회적 범죄, 부르주아의 위선 등 파괴되어야 마땅한 체제의 모든 은밀하고 추악한 것들을 스캔들로 폭로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브뉘엘은 나중에 초현실주의가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다소 회의적이라고 말한다. 초현실주의가 문화와 예술의 연대기에 이름을 남겼을뿐 세계를 변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브뉘엘 또한 자신의 영화가 영화의 연대기에 단지 이름을 남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황금시대> 이후 그는 초현실주의자들과 결별한다. 하지만 그에게 초현실주의 그룹과 함께 한 파리 시절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고 그의 영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의 고향 멕시코 - 종교, 죽음, 에로티시즘의 삼위일체
1933년 <빵 없는 대지>를 만든 후 브뉘엘은 멕시코 제작자인 오스카르 단시헤르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멕시코에서의 영화 작업을 시작한다. 초기 스페인 시절(1928-1932)과 <비리디아나>의 성공 이후 시작된 전성기 프랑스 시절(1963-1977)에 중간에 속하는 멕시코 시절(1946-1962) 동안 브뉘엘은 그의 전 작품 32편 중 20편을 만드는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었다.
1950년 브뉘엘은 한 달 만에 저예산으로 <잊혀진 사람들>을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 브뉘엘은 대도시 외곽의 청소년 탈선 문제를 잔혹하게 그려낸다.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였지만, 브뉘엘 자신은 네오리얼리즘 영화에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브뉘엘은 늘 우리들이 최상의 세계에 사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그는 가난을 미화하는 대신 가난한 사람들을 겁나고 무서운 사람들로 묘사한다. <비리디아나>에서 브뉘엘은 또한 거지들을 약탈, 신성 모독, 폭동, 강간을 저지르는 타락한 존재로 묘사한다. 그는 가톨릭 교회가 거지나 문둥병 환자들을 '넝마에 가린 순수한 이미지'로 묘사하는 것을 혐오했고, 천주교인들의 자선이 오히려 세계의 혼돈을 초래한다고 생각했다.
멕시코 시절 브뉘엘은 후기작인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자유의 환영>,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부르주아에 대한 냉정하고 파괴적인 시선을 앞질러 가장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 <이상한 정열>(1952)의 프란시스코 갈반, <아르치발도의 범죄 인생>(1955)의 아르치발도는 이 시기 그가 만들어낸 가장 매혹적인 캐릭터다. <이상한 정열>에서 그는 발에 대한 페티시즘뿐만 아니라 사도 마조히즘적인 충동을 보여주었고, 사드에 대한 자신의 매혹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는 사드의 에로틱한 상상력을 영화화하고 싶어했다. 브뉘엘은 "상상은 정신적인 수준에서 어떤 것이든 허용할 수 있다. 사드가 놀라운 것은 그가 자신의 상상에 완전한 자유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연과 신비의 중간 어딘가에 상상이 존재한다. 비록 사람들이 상상을 억압하고 그것을 죽이려 함에도 불구하고 상상은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는 유일한 수단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구속돼 있다. 인간이 단지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자유는 "상상"에 있다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런 엽기적인 상상력은 한 남자의 병리학적인 충동을 다룬 에로틱한 영화 <아르치발도의 범죄 인생>에서도 가장 유머러스하게 나타난다. <이상한 정열>의 주제를 한층 에로틱하게 변형한 이 작품은 부르주아 여성이 경험하는 성적 판타지를 다룬 <세브린느>와 더불어 에로티시즘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 영화에 대한 명백한 헌사를 우리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라이브 플레쉬>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아르치발도의 범죄 인생>의 한 장면(마네킹을 불에 태우는 장면)을 자신의 영화에서 인용한다. 그는 자신의 영화와 브뉘엘의 그것이 같은 내용을 다룬 것이라고 말했다. "<아르치발도의 범죄 인생>에서 브뉘엘은 죄책감과 죽음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스페인 문화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신들을 겁나게 하는 것을 조롱하는 것 말이죠. 그것은 또한 내가 <라이브 플레쉬>에서 시도한 것입니다."
쾌활하고 사려 깊은 낙관적인 아나키스트
프랑수아 트뤼포는 <내 인생의 영화>라는 책에서 브뉘엘을 절망적인 세계를 그려낸 잉마르 베리만과 삶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려 힘쓴 장 르누아르의 중간쯤에 위치시키며 그를 "파괴적이지만 행복한 아나키스트"라고 말한다. 브뉘엘은 평생을 초현실주의자로 살았고, 염세주의나 절망에 굴복한 예술가들과는 달리 삶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브뉘엘은 늘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슨 웰스는 그를 영화 역사상 최고의 종교적인 감독으로 손꼽았다. 웰스는 브뉘엘이 "오직 천주교인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신을 증오한 독실한 신자"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영화 비평가인 알랭 베르갈라는 또한 브뉘엘이 평생에 걸쳐 인간으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 창조자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제한하려는 그 어떤 것과도 전투적으로 싸운 쾌활하고 사려 깊은 투사였다고 말한다.
브뉘엘은 1983년 7월 29일 오후 4시 5분 멕시코시티의 영국 병원에서 신장과 심장 이상으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라스 로마스에서 화장됐고,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그의 친구이자 고해 신부였던 훌리안 파를로스 사제에 의해 코필코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죽기 직전에도 그는 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자신이 친구들에게 던질 마지막 농담을 상상했었고, 자신이 그 순간 농담을 할 용기가 정말 있을까에 대해 걱정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2000년. 서울에서 브뉘엘의 영화와 만나는 것은 그의 자유로운 '상상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정말 행복한 경험의 순간이 될 것이다.
100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마에스트로 브뉘엘!
제2의 고향 멕시코
스페인으로 돌아온 브뉘엘은 1933년 <빵 없는 대지>를 만들었고, 이 영화가 그리는 스페인 시골 마을의 참혹한 삶은 당시 공화당 정권의 낙관적인 모습과 어울리지 않아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다. 브뉘엘은 마드리드에 있는 영화사 '필모포노'에서 상업영화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잠시 동안 할리우드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멕시코 제작자인 오스카르 단시헤르스는 브뉘엘에게 멕시코 영화계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고, 브뉘엘은 1946년 가족들과 함께 멕시코에 정착한다. 그의 멕시코 시절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브뉘엘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대부분 초현실주의 작품을 만들어낸 초기 스페인 시절(1928-1932)과 <비리디아나>의 성공 이후 시작된 전성기 프랑스 시절(1963-1977)에 집중돼 왔다. 하지만 이 두 시기의 중간기인 멕시코에서의 20여 년(1946-1962) 동안 브뉘엘은 그의 전 작품 32편 중 20편을 만들었다. 그는 멕시코 영화산업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브뉘엘은 멕시코에서 장르와 서술의 코드를 지닌 영화산업과 만났고, 그것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변형시켰다. 초현실주의적인 느낌을 유지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 종교의 테마를 영화에 복잡하게 뒤섞어, 가장 친근하고 유머러스한 영화들을 이 시기에 만들어냈다. <그란 카시노>, <방탕아>와 같은 유쾌한 코미디 영화로 흥행에 성공한 브뉘엘은 <잊혀진 사람들>로 다시 한 번 세계 영화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한 달 만에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브뉘엘은 대도시 외곽의 청소년 탈선 문제를 잔혹하게 그려낸다. 불운은 피할 수 없다. 아무리 변화를 찾으려 해도 환경이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전반에 등장하는 불운의 상징인 닭, 어린 하이보가 고통을 느낄 때 거리를 지나가는 개의 이미지에는 고독과 죽음이 담겨 있다. 이 영화는 마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떠올리게 했지만 브뉘엘은 자신은 네오리얼리즘 영화에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브뉘엘은 늘 우리들이 최상의 세계에 사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그는 가난을 미화하는 기독교적 관점을 혐오했고, 특히 데시카의 <밀라노의 기적>을 싫어했다. <잊혀진 사람들>에서 브뉘엘은 가난한 사람들을 겁나고 무서운 사람들로 묘사한다. 1961년에 만든 <비리디아나>에서도 브뉘엘은 거지들을 미화하기보다는 약탈, 신성 모독, 폭동, 강간을 저지르는 타락한 존재로 묘사한다. 그는 가톨릭 교회가 거지나 문둥병 환자들을 '넝마에 가린 순수한 이미지'로 묘사하는 것을 혐오했고, 천주교인들의 자선이 오히려 세계의 혼돈을 초래한다고 생각했다. 잔혹한 현실을 끔찍하게 묘사하면서 브뉘엘은 역설적으로 부패하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을 그려낼 수 있었다. 프랑스의 영화 비평가인 앙드레 바쟁은 그래서 "이 영화의 미덕은 잔인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이며, 데카당스한 가운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숭고한 인내를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에로티시즘, 종교, 죽음의 3위 일체
멕시코 시절 브뉘엘은 후기작인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 분명하게 나타나는 부르주아에 대한 냉정하고 파괴적인 시선을 앞질러 가장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 <이상한 정열>(1952)의 프란시스코 갈반, <아르치발도의 범죄 인생>(1955)의 아르치발도는 이 시기 그가 만들어낸 가장 매혹적인 캐릭터다. 부유한 40세의 숫총각 프란시스코가 성당 미사 도중 한 여인의 아름다운 다리에 매혹되면서 강박관념과 현실을 혼동, 급기야 부인을 살해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기묘하게 그려낸 <이상한 정열>은 브뉘엘 스스로 "내 자신을 가장 많이 주인공에 집어넣은 작품이며 주인공 안에는 내가 있다"라고 말한 자전적인 영화다.
브뉘엘은 이 영화에서 발에 대한 페티시즘뿐만 아니라 사도 마조히즘적인 충동을 드러내면서 사드에 대한 자신의 매혹을 숨김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사드의 에로틱한 상상력을 영화화하고 싶어했다. 브뉘엘은 인터뷰에서 "상상은 정신적인 수준에서 어떤 것이든 허용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매우 극단적인 한계까지 갈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총을 움켜쥐고 당신들을 지금 쏠 수도 있다. 사드가 놀라운 것은 그가 자신의 상상에 완전한 자유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책에서만 그랬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브뉘엘은 또한 "다행스럽게도, 우연과 신비의 중간 어딘가에 상상이 존재한다. 비록 사람들이 상상을 억압하고 그것을 죽이려 함에도 불구하고 상상은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는 유일한 수단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구속돼 있다. 인간이 단지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자유는 상상에 있다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런 엽기적인 상상력은 여자를 강박적으로 살해하려 하지만 계속 좌절하는 한 남자의 병리학적인 충동을 다룬 에로틱한 영화 <아르치발도의 범죄 인생>에서도 엿보인다. 아르치발도는 어린 시절 갑자기 날아온 총탄이 하녀의 가슴을 관통하는 순간 여인의 벗겨진 허벅지에 매혹을 느낀다. 죽음에 대한 쾌락과 여성에 대한 강박관념이 가득한 이 영화는 <이상한 정열>의 주제를 한층 에로틱하게 변형시켰고, 부르주아 여성이 경험하는 성적 판타지를 다룬 <세브린느>와 더불어 에로티시즘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프랑수아 트뤼포나 에릭 로메르는 <이상한 정열>을 멕시코 시절의 걸작으로 평가하는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아르치발도의 범죄 인생>을 그것에 버금가는 걸작으로 손꼽고 있다. 특히 이 영화에서 보이는 독특한 회상 구조를 극찬한 트뤼포는 "재치 있는 구성과 대담한 시간 조작, 영화적 내러티브 기술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이 영화를 평했다. 이 영화에 대한 명백한 헌사를 우리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라이브 플레쉬>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아르치발도의 범죄 인생>의 한 장면(마네킹을 불에 태우는 장면)을 자신의 영화에서 인용한다. 그는 자신의 영화와 브뉘엘의 그것이 같은 내용을 다룬 것이라고 말했다. "<아르치발도의 범죄 인생>에서 브뉘엘은 죄책감과 죽음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스페인 문화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신들을 겁나게 하는 것을 조롱하는 것 말이죠. 그것은 또한 내가 <라이브 플레쉬>에서 시도한 것입니다."
브뉘엘은 멕시코 시절, 영화 제작자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언제나 제작자가 요구한 대로 제때 작품을 만들어냈고, 적은 예산에도 불구하고 기술적인 면에서 흠 잡을 데 없는 완성도 있는 영화를 생산해냈다. 호세 안토니오 발데스 페나가 지적하듯 브뉘엘이 멕시코에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수많은 스탭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훌리오 알레한드로, 쟈넷과 루이스 알코리사 부부와 같은 작가들, 촬영감독인 가브리엘 피게로아(그는 <잊혀진 사람들>, <나사린>, <죄의 공화국>을 촬영했다),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와 귄터 거소나와 같은 무대감독들, 그리고 자신의 세계관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진정한 예술가들이었던 오스카르 단시헤르스, 마누엘 바르바차노, 구스타포 알라트리스테와 같은 제작자들의 도움 덕분에 브뉘엘은 멕시코에서 자유롭게 창조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브뉘엘이 멕시코를 '제2의 고향'이라고 회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61년 브뉘엘은 자신의 고국 스페인에서 <비리디아나>를 만든다. 당시 프랑코 정권의 엄격한 검열이 존재했던 스페인에서 만든 이 영화는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고, 종교를 모독했다는 이유 때문에 스페인의 가톨릭 교회와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는 영광을 얻었고, 이후 브뉘엘은 멕시코를 떠나 프랑스에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1967년 67세의 나이에 그는 부르주아 여성의 성적 판타지를 그린 <세브린느>를 만들었다. 일부 사람들은 늙고 술에 찌든 귀머거리 노인이 이제 그만 멕시코로 돌아가 쉬기를 원했다. 하지만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은 그를 알프레드 히치콕, 하워드 혹스와 같은 거장의 작품과 함께 재평가했고, 환대했다. 70세가 넘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후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자유의 환영>, <욕망의 모호한 대상> 등 부르주아에 대한 은밀한 비판이 담긴 3부작을 완성하는 저력을 보였다.
쾌활하고 사려 깊은 낙관적인 아나키스트
프랑수아 트뤼포는 <내 인생의 영화>라는 책에서 브뉘엘을 절망적인 세계를 그려낸 잉마르 베리만과 삶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려 힘쓴 장 르누아르의 중간쯤에 위치시키고 있다. 그는 브뉘엘이 "파괴적이지만 행복한 아나키스트였고,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만큼 풍자적이었지만 더 가벼운 터치의 유머를 선보인 감독"이라고 평가했다. 브뉘엘은 평생을 초현실주의자로 살았고, 염세주의나 절망에 굴복한 예술가들과는 달리 삶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브뉘엘은 늘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슨 웰스는 그를 영화 역사상 최고의 종교적인 감독으로 손꼽았다. 웰스는 브뉘엘이 "오직 천주교인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신을 증오한 독실한 신자"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영화 비평가인 알랭 베르갈라는 또한 브뉘엘이 평생에 걸쳐 인간으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 창조자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제한하려는 그 어떤 것과도 전투적으로 싸운 쾌활하고 사려 깊은 투사였다고 말한다.
브뉘엘은 1983년 7월 29일 오후 4시 5분 멕시코시티의 영국 병원에서 신장과 심장 이상으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라스 로마스에서 화장됐고,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그의 친구이자 고해 신부였던 훌리안 파를로스 사제에 의해 코필코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죽기 직전에도 그는 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자신이 친구들에게 던질 마지막 농담을 상상했었고, 자신이 그 순간 농담을 할 용기가 정말 있을까에 대해 걱정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2000년. 서울에서 브뉘엘의 영화와 만나는 것은 그의 자유로운 '상상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정말 행복한 경험의 순간이 될 것이다. Feliz centenario, maesstro Bu uel !
* 그의 작품들
안달루시아의 개 Un Chien andalou
1929년/17분/흑백
루이 브뉘엘은 1927-28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프랑스 아방가르드 영화들을 보며 영화에 매혹당했다. 그해 겨울 브뉘엘은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와 만나 최근에 꾼 기이한 꿈 이야기를 나눈다. 달리는 꿈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둘은 관념의 자유연상에 기초해 합리적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안달루시아의 개>를 만든다. 달리와 브뉘엘은 처음 이 영화의 제목을 기차 창문에 적힌 문구인 '안에 기대는 것은 위험합니다'라고 불렀다. 나중에 달리는 브뉘엘이 쓴 시집의 제목 '안달루시아의 개'로 제목을 바꾼다. 여자의 눈을 면도날로 절단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17분에 불과하지만 당시 그 어떤 영화보다 큰 충격을 주었다.
빵 없는 대지 Tierra sin pan
1932년/30분/흑백
'라스 우르데스'라는 스페인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빈민층의 삶을 다룬 <빵 없는 대지>는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 다큐멘터리 영화 형식을 풀어헤치고 위반하면서 관습적인 탐방기를 조롱한다. 그는 촬영 10일 전에 이 지역을 방문했고, 거기서 '염소, 말라리아에 걸린 아이, 말라리아 모기, 노래도 없고 빵도 없다'와 같은 간단한 인상들을 노트에 적었고, 이를 바탕으로 <빵 없는 대지>를 만들었다. 친구이자 아나키스트였던 아신의 복권 당첨금으로 브뉘엘은 이 영화를 만들었지만 스페인 당국은 종교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스페인에서의 상영을 금지시켰다. 1936년 프랑코의 반란 동안 아신은 반역자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 영화에 얽힌 가슴 아픈 역사와 마찬가지로 브뉘엘은 이 영화를 끝으로 스페인을 떠나 멕시코에서 제2의 삶을 시작한다.
잊혀진 사람들 Los Olvidados
1950년/88분/흑백
<황금시대>와 <빵 없는 대지> 이후 스페인을 떠난 브뉘엘은 멕시코에서 몇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1950년 오랜 침묵을 깨고 브뉘엘은 멕시코 외곽에 살고 있는 청소년의 삶을 잔혹하게 그린다. 내용의 잔혹성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이 작품은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에 관한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잔혹함을 통해 브뉘엘은 역설적으로 부패하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을 그려낸다. 잔혹함을 사랑과 열정의 행위로 변형시키는 이 영화에 대해 앙드레 바쟁은 '사랑에 관한 영화이자 사랑을 필요로 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이상한 정열
1952년/92분/흑백
부유한 40세의 숫총각 프란시스코는 성당 미사에서 한 여인의 아름다운 다리에 매혹을 느낀다. 프란시스코는 집요하게 여인을 쫓아가고 결국 그녀와 결혼한다. 하지만 의처증에 시달리는 프란시스코는 점점 강박관념과 현실을 혼동하고 급기야 로프로 그녀를 살해할 결심을 한다. 강박적인 사랑의 파괴적인 힘과 편집증에 시달리는 인물을 코믹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히치콕의 <현기증>과 비교되기도 한다. 관음증과 사도 마조히즘적인 충동, 발에 대한 페티시즘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 작품의 주인공 프란시스코는 브뉘엘 자신의 자화상으로 알려져 있다. 멕시코 시절에 만든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멕시코에서 버스 타기(승천) Subida al cielo
1952년/85분/흑백
신혼여행을 떠난 청년 올리베리오는 갑작스런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머니의 유언장을 작성할 공증인을 데려오기 위해 올리베리오는 버스를 타고 읍내로 향한다. 제정신이 아닌 버스 운전사, 올리베리오를 유혹하는 요염한 라켈, 그녀를 갈망하는 국회의원들 때문에 버스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어나고 급기야 버스 운전사는 자신의 어머니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차를 멈춘다. 술에 잔뜩 취한 운전사를 대신해 올리베리오는 버스를 몰고, 버스에 동승한 라켈과 사랑을 나눈다. 멕시코에서 만든 영화 중 브뉘엘이 각별히 사랑했던 이 작품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삶의 기쁨과 사랑, 사회, 죽음을 흥겹게 그린 행복한 영화다.
환상의 전차를 타고 여행하다 La Ilusion viaja en tranvia
1953년/90분/흑백
수년 간 몸담아온 낡은 전차를 폐차시키겠다는 결정에 화가 난 두 젊은 직원(운전사와 차장)은 낡은 전차를 몰고 멕시코 시내를 여행한다. 이들의 환상적인 여정을 따라 멕시코의 가난한 이웃들의 삶이 사실적으로 드러난다. 종교와 국가에 대한 도발적이면서도 은유적인 주장, 풍자가 가득 담긴 이 영화는 또한 다분히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한 해의 마지막인 파사다사(크리스마스가 오기 두 주 전) 기간에 공연되는 멕시코 민중의 '파스토렐라(멕시코에서 전통적으로 크리스마스에 공연되는 미스터리한 연극)'를 흥겹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범죄에 대한 수필(아르치발도의 범죄 인생) Ensayo de un crimen
1955년/90분/흑백
어린 시절 아르치발도는 어머니에게 음악상자를 선물받는다. 음악상자에서 왈츠가 흘러나오는 동안 그의 가정교사는 갑자기 날아온 총탄에 맞아 숨진다.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가정교사의 허벅지에 묘한 매혹을 느낀다. 어른이 된 아르치발도는 자신의 소명이 살인자가 되는 것이라고 믿고 여자를 강박적으로 살해하려 한다. 하지만 그의 살인 기도는 매번 좌절된다. 죽음과 에로티시즘이 기묘하게 결합된 이 영화의 독특한 회상 형식은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을 매료시켰다.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라이브 플레쉬>에서 인용한 영화가 바로 이 작품이다.
나자린 Nazarin
1958년/94분/흑백
그리스도의 계율에 따라 엄격하게 살고자 하는 한 성직자가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려 하지만 좌절되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1961년작 <비리디아나>와 자주 비교되는 작품이다. 브뉘엘은 신성화된 성직자의 이미지를 파괴하면서 그 또한 인간임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 신앙, 희망, 고통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형제애를 모호하게 그린 이 영화를 두고 성직자들은 종교적인 영화로, 무신론자들은 신성모독을 보여주는 브뉘엘의 대표작으로 받아들였다. 옥타비오 파스는 이 작품이 '인간의 조건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방법을 보여준다. 나자리오는 신을 잃어버렸지만 사랑과 형제애를 발견한다'라고 평했다.
하녀의 일기 Le Journal d'une femme de chambre
1963년/98분/흑백
몽테이가의 하녀로 들어간 셀레스틴은 하녀들과 성관계를 맺으려는 호색한 몽테이의 유혹을 받는다. 프랑스 시골 부르주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담긴 이 영화에서 브뉘엘은 꼬마 소녀 클레르의 살인을 명백한 파시즘으로 비판한다. 달팽이를 모으는 무고한 소녀 클레르를 강탈하고 살해하는 장면과 소녀의 작은 다리 위로 달팽이가 기어올라가는 장면은 끔찍하면서도 기묘한 판타지를 느끼게 한다. 발과 신발에 대한 페티시즘을 갖고 있던 브뉘엘은 누벨바그의 페르소나였던 잔 모로가 발목을 조금씩 흔들며 걷는 모습에 묘한 매력을 느꼈고, 그 이유 때문에 그녀를 캐스팅했다.
세브린느 Belle de Jour
1967년/100분/컬러
성적인 억압, 자유, 에로티시즘에 관한 브뉘엘의 도발적인 정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작품. 영화의 첫 장면. 남편인 피에르가 부인 세브린느(카트린느 드느브)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재갈을 물리고 채찍으로 내리치는 가학적인 장면은 성적인 희열에 대한 욕망과 판타지를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성적인 판타지와 현실이 복잡하게 뒤섞인 이 영화는 부르주아 여성의 평범한 삶 속에 음란한 성적 판타지가 또한 숨겨져 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에로틱하면서도 몽환적인 정서는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샷>으로 이어진다. 1967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
1972년/105분/컬러
브뉘엘이 72세에 만든 이 영화는 매번 좌절되는 부르주아들의 식사를 기이한 상황과 연결해서 보여준다. 매번 좌절되는 식사는 부르주아의 욕망이 해소할 수 없는 모호한 대상임을 암시한다. 식사를 하던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이 무대에 있음을 갑자기 깨닫는 장면과 한 병사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인상적인 이 영화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 <자유의 환영>과 더불어 부르주아에 대한 브뉘엘의 비판이 가득 담긴 작품이다. 사막을 걷는 부르주아들의 모습은 마치 꿈처럼 보이지만 브뉘엘은 그것을 현실과 구분하지 않는다. 자신 또한 부르주아지만 은밀하지 않다고 말하는 브뉘엘에게 꿈은 또한 현실이자 깨어 있는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환영 Le Fantome de la libert
1974년/104분/컬러/35mm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하는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제목을 빌려온 브뉘엘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자유가 환영이라고 말한다. 보르헤스의 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처럼 이 영화는 각각의 에피소드와 인물들을 연결짓고 분기시키면서 끝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우연이 삶을 결정한다고 믿는 브뉘엘의 독특한 이야기 구성과 부르주아 사회의 정상성을 뒤집는 브뉘엘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고상한 부르주아들이 대변기에 앉아 용변을 보며 점잖은 대화를 나누고, 음식은 화장실처럼 보이는 고립된 방에서 혼자 먹는 장면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