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모호한 대상

영화 2007. 9. 13. 23:50
욕망의 모호한 대상.

루이 브뤼넬의 이 영화에서 말해지는 건 제목 그대로이다. 마띠유는 돈으로 사랑하는 젊은 여인을 사려고 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그런데 그 실패는 계속되는 성공의 끝자락에서의 실패다. 젊은 여인 콘치타는 그의 돈을 처음엔 거절하지만 현실의 법칙대로 결국엔 돈을 수락한다. 마띠유가 번번히 대상 콘치타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콘치타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는 새로움 없이 통속적인 방식으로 콘치타의 타락 혹은 추락으로 보상받는 듯이 보인다. 콘치타는 다시 금전적 어려움으로 몸을 팔며 생활하고 있다. 마티유는 이러한 콘치타와의 재회에서 그러한 상황을 연민의 감정으로 본다. 그리고 다시 콘치타를 금전적으로 도와주지만 콘치타는 그러한 마티유를 배반하며 비웃는다. 이는 콘치타가 "당신은 너무 순진하군요"라는 말로 어떤 진실을 보여준다. 그건 콘치타 자신과 마티유에 대한 조언과 같다. 마티유가 원한건 콘치타와의 성관계였지만 그것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영화는 끝맺는다. 하지만 그에 앞서 마티유는 그러한 성관계를, 즉 대상을 가지는 것을 암시하는 풍경을 보여주는데, 그의 지배인이 말하는 한 철학자의 말로 상징된다. "여자와 오래동안 지내려면 몽둥이를 옆에 두고 있어야 한다"

[아하! 맞다]
 굵게 표시된 부분에서 나오는 하인의 말. 그런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 말대로 하니 콘치타가 마티유 옆에 서게 되는 상황들.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영화의 최고조에서 보여주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철학자가 말하고자한 폭력이었다. 마티유는 결국 자신을 실망시킨 콘치타에게 분노하고 폭력을 가한다. 그러나 그러한 댓가로 마티유가 그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 오히려 그녀를 갖게 된다. 그녀는 그러한 마티유에게 오히려 매달린다. 이는 콘치타가 그동안 자신에게 베풀어온 마티유의 은혜, 선행에 갚을 수 없는 부채를 덜어내는 방법이었다. 이는 다른 많은 영화들에서도 주제화 되어 왔다. 약간 변조된 형식으로 일방적인 사랑과 계속 되는 도피...포레스트 검프의 내용도 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포레스트 검프에서 제니는 포레스트의 사랑을 받아 들이는 순간 죽는다. 아니 그녀는 병에 걸려 포레스트를 만났고, 이는 그녀의 죽음이 포레스트를 받아 들인 것이다. 이는 브뤼넬의 영화가 폭력으로 해소한 부채의 해소방법을 택하는 대신 낭만적 결말을 택한 것이다.

[글쎄~ 이건..좀..]
 굵게 표시되는 내용은 맞다고 생각 되는데, 감독이 폭력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는 것은 겉만 본게 아닐까. 감독은 중간중간 테러와 살인등의 슛을 넣어서 모호한 욕망에 대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낭만적 결말이라니?
 덧붙여 얘기하면 엔딩은 그리 낭만적 결말이 아닌데! 콘치타가 결국 마티유의 마음을 알고 화를 내고 마티유는 거기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제스쳐를 취하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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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블루아레나